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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 침몰 사고 는 1912 년 4 월 14 일 밤부터 15 일 아침까지 북대서양 에서 일어났다. 사우 샘프턴에서 뉴욕행의 첫 항해날 일어났다. 당시로서는 최대의 여객선인 타이타닉 호 는 1912 년 4 월 14 일 일요일 23시 40 분에 빙하와 충돌했다. 당시 타이타닉호에는 2224 명이 타고 있었지만 사고 2 시간 40 분만에 1500 명 이상 사망했다. 이것은 역사상 바다에서 일어난 사고의 최대 사망자 수이다.


사고 당시, 견시수는 6 개의 커다란 빙하 덩어리에 대해 경보했지만, 이미 배는 최고에 가까운 속도로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배 옆면과 빙하가 부딫혔고, 바닷물은 빠른 속도로 밀려들어왔다. 타이타닉 호는 4 개의 구획으로 나뉘어 있어 일부 침수돼도 떠 있도록 설계돼 있었지만 넓은 범위에 걸쳐 데미지를 입는 바람에 침몰은 피할 수 없었다. 또 타이타닉의 구명 보트 시스템은 일부 승객을 수송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지, 위급시 전원을 태우도록 설계된 것은 아니어서 인원피해를 키웠다. 또한 배가 급격히 가라앉는 바람에 모든 승객이 안전하게 퇴선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이 외에도 허술한 피난 관리 탓에 완전히 배가 침몰되기 전, 많은 보트가  빈 자리가 있음에도 이미 출발 해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타이타닉 호는 천명 이상의 승객과 승무원을 태운 채 침몰했다. 바다에 뛰어 들거나, 떨어진 사람 대부분은 몇 분 후 저체온증에 의해 익사했다. 카루빠시아 호가 4 월 15 일 9시 15 분 현장에 도착했지만 이는 충돌 후 약 9 시간 반이 흐른 뒤였다.


이 재해는 구명 보트의 부족, 느슨한 피난관리. 계급간 불평등 등에 대해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이후 인명 구조의 규칙이 바뀌어 1914 년 해상 인명 안전 협약 (SOLAS)가 만들어졌다. 


1912 년 4 월 14 일 


빙산의 경고 (09 : 00-23 : 39) 


4월 북미 바다의 얼음 상태는 지난 50 년 동안 최악이었다.  1912 년 4 월 14 일 타이타닉의 무선 운영자는 다른 선박에서 표류하고있는 얼음 대해 6 건의 경고 통신을 받았으며 타이타닉 승선자 중에도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이 있었다. 



빙산 과 빙원 에 관한 최초의 경고는 09:00에 RMS 카로니아 호에서 받았다 . 타이타닉호 스미스 선장은 이 메시지를 수령했다. 


13:42에 발틱호가 그리스 선박 아테니아호에서 빙산과 빙원을 목격했다는 보고를 받아 타이타닉 호에 중계했다 . 이에 스미스 선장은  항로를 남쪽으로 변경시켰다.


13:45에 조금 남쪽을 항해하고 있던 독일 선박이 "큰 빙산 두개가 지나 갔다"는 보고를 해왔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스미스 선장에게도, 타이타닉호의 다른 대원에게도 전해지 않았다.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무선 운영자가 기기 결함을 고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9분. 캘리포니아 바겐 호는 "3 개의 큰 빙산'이 있다고 보고했고, 21 : 40에 메사바호가 식물 얼음, 빙산, 빙원의 보고를 했다 . 이 메시지도 타이타닉의 무선실에 접수됐지만 대처는 없었다. 전날 밤 고장난 무전을 제대로 고치지 않아서다. 마지막 빙하 경고는 22:30에 캘리포니아 바겐호에서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무전에도 타이타닉호는 별 대응을 취하지 않았다.


당일 날 승무원이 타이타닉호 근처에 큰 얼음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배는 감속하지 않고 최고 속도 인 24 노트에서 단 2 노트 느린 22 노트(시속 41 킬로미터, 25mph)로 항해하고 있었다.


빙하가 많은 해역을 전속력으로 항해한데 대해 사후분석에선 질타가 쏟아졌으나, 항해 당시에는 관습대로 해온 것이었다.


당시 항해 관습에 따르면 빙하 보고에 대해 단순 주의하라는 정도로 취급했다. 또 빙하는 항해에 있어 대단한 위험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1907년 독일의 정기선 SS 크론 프린츠 빌헬름호는 항해 중 빙산에 충돌해 선수가 대파됐음에도 침몰하지 않고 항해를 완료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스미스 선장도 항해 이전 인터뷰에서 "타이타닉호가 침몰하는 상황은 상상할 수도 없다. 현대 조선은 그런 수준을 넘어 섰다"고 말하기도 했다.


"전방에 빙산!"(23:39) 


타이타닉이 빙산과 충돌하기 직전까지 대부분의 승객은 잠들어 있었다. 갑판에서 29미터 높이의 전망대에 감시자가 있었지만, 배 주위는 암측이었다. 공기는 맑았으나 달은 보이지 않았고, 근처 빙산 위치 단서가 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파도가 거칠게 쳤다면, 빙산에 부딪히기 때문에 빙상 위치 파악이 쉬웠겠지만 수면은 매끄러울 정도로 잔잔했다고 한다. 별빛과 선박 자체에서 나오는 빛 이외의 광원이 없는 완전한 어둠 상태였다.


23:30분에도 수평선으로 희미하게 안개가 껴 있었을 뿐 특별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9 분 후 23:39에 전망대에 타이타닉 진행 방향 바로 앞에 빙산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감시자는 벨을 3 번 눌러 조타실에 이 사실을 알렸다.


견시수 : 누구 없습니까?

조타실 : 네. 뭐가 보입니까?

견시수 : 앞으로 빙산!

조타실 : 알겠습니다


이에 조타실은 항로를 바꾸도록 명령했다. 조타실에 머독은 "우현 가득"( "Hard a'starboard")라고 명령했고, 엔진실에는 "전속 후진"( "Full Astern")이라고 명령했다. 머독은 스미스 선장에게는 빙산을 피하기 위해 크게 우회를 시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명령이 실현되기 까지는 어느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증기로 움직이는 조종 시스템은 선박의 방향타가 실제 회전될 때까지 30초가 걸렸다. 


후진 작업에도 시간이 걸렸다. 중앙 터빈을 역 회전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엔진실은 중앙 터빈과 중앙 프로펠러의 연결을 끊는 조치를 했다. 


타이타닉은 빙상과의 전면 충돌은 피했지만 진행방향으로의 원심력 때문에 결국 대각선을 틀어진 채 배 옆면이 빙산과 부딫쳤다.


충돌의 결과


빙산과의 충격으로 선체에 큰 구멍을 뚫렸다. 가장 큰 균열은 약 39 피트 (12 m) 정도의 길이로 찢어졌고, 그 틈으로 바닷물이 유입됐다. 차가운 바닷물이 증기실로 유입되면 증기엔진은 아직도 고온 · 고압의 증기로 가득했기 때문에 차가운 바닷물과 접촉하면 폭발 할 위험성도 상당했다. 그러나 다행히 엔진이 바닷물과 접촉하기 전 대량의 증기를 배기 굴뚝에서 보내는 작업을 통해 엔진 폭발은 막았다.


 

배에는 침몰을 방지하기 위해 방수 격벽이 설치돼 있었으나, 타이타닉 호는 총 5 개의 구획이 손상을 입어, 침몰을 막을 수 없었다.


첫 충돌 이후 45 분내에 적어도 13,700 t의 물이 배에 들어왔다. 타이타닉의 밸러스트 및 선저 펌프로는 대응할 수없는 양이었다. 배에 설치된 펌프의 최대 배수량은 시간당 1700t이었다.


이 상황에서 타이타닉은 최대 2 시간 이상 견딜 수 없었다. 

타이타닉 충돌 후 1시간동안 0도에서 4.5도까지 기울었기 때문에 구출되기 전까지 배가 떠있는 것이 아니냐는 희망을 안고 있는 사람도 허다했다. 그러나 침몰 속도는 빨라지고  1시간30분 후 타이타닉 기울기는 10도였다.


1912 년 4 월 15 일


퇴선 준비 (00 : 05-00 : 45)



4월15 일 00:05에 스미스 선장은 선박의 구명정을 내리도록 명령했다. 또 선장은 무선 통신에 조난 신호를 보냈다.


또 타이타닉에는 중앙통제실이 없었기 때문에 승무원들이 일일이 객실 각방을 돌며 자고있는 승객과 승무원을 일으켜 보트 선착장으로 대피하도록 했다.


그러나 많은 승객과 승무원들은 배의 침몰을 믿지 않는다거나 날씨가 무척 추웠기 때문에 배 안에서 따뜻하게 있고 싶어했다. 일부 승객들에게는 배가 침몰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지도 않았다. 


00:15 경 승무원들은 승객들에게 구명조끼 착용을 명령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승객은 이를 듣지 않았다. 갑판에 나온 사람들은 갑판에 떨어져 있는 얼음 덩어리로 축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보트 갑판에선 선원들이 구명 보트를 준비했으며 갑판에선 굴뚝에서 배출되는 고압 증기의 소리 가 굉장히 컸기 때문에 승무원들은 손으로 사인을 하며 의사 소통했다.


타이타닉은 총 20 척의 구명 보트가 실려있었고, 구명 보트는 1척당 평균 68 명이 탈 수 있었지만 구조된 인원은 1100여명에 불과했다.


또 타이타닉은 68 척까지 구명 보트를 실을 수 있도록 설계됐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68척을 모두 실었다면 탑승객 전원이 대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스미스 선장은 40 년을 바다에서 보내고, 그 중 27 년은 선원을 지도한, 경험있는 선원이었지만 실제상황에선 그의 명령은 제대로 전달조차 안됐다. 


조타수는 사람들 피난이 시작되고 구명보트가 내려간 것을 뒤늦게 보고선, 전화로 왜 구명보트가 내려가 있느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또 구명 보트 탈출 훈련을 형식적으로 했기 때문에 승무원들은 긴급시에 대한 대처법도 숙지돼 있지 않았다. 보트에는 또한 비상 물자를 담아둬야 하지만 일부 배는 이런 물자가 준비되어 있지도 않았다.


승무원의 대부분은 선원이 아니여서 보트 노 젓는 경험조차 전혀 없었던 사람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총 1100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태운 20 척의 보트를 지휘해야 했다.


때문에 승객 전원을 태울 수 있는 구명정이 있었다 해도 모두 구명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하는 역사가조차 있었다.


충돌 40 분 후 00:20 경까지는 구명 보트 픽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한 이등 항해사는 스미스 선장이 멘붕 상태 인 것처럼 멍하게 다리 옆에 서서 바다를 보고 있었다고 나중에 회상하고 있다.


선장이 여성과 아이들 먼저 태우라는 지시도 항해사 마다 엇갈리게 해석했다. 한쪽에선 무조건 여성과 아이들만 태웠고, 자리가 비었더라도 남자 성인을 태우지 않았다. 반면 한쪽에선 자리가 빈 경우 남자르도 함께 태워 보냈다.


또한 적재 인원 최대치까지 태웠다면 500 명 정도의 사람들의 더 소중한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많은 구명정이 공석이 있는 채로 떠났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구명 보트에 타려는 승객이 거의 없었고 선원들도 승객을 좀처럼 설득 할 수 없었다. 일부 승객은 "저런 작은 보트보다 여기에 남는 편이 더 안전하다"고 우기면서 보트 승선을 거절했다.


00:45. 처음으로 7 번 구명 보트가 28 명의 승무원 (정원 65 명)을 태운 채 타이타닉 호에서 떨어져 나갔다. 


00 : 55에 그 다음 보트가 28 명만 태운 채 타이타닉호에서 떨어졌다. 


갑판 아래에서는 침수가 계속 진행되는 가운데 필수적인 작업을 계속하려고 했던 승무원도 있었다. 엔지니어와 기관 조수는 차가운 물과 접촉하며 폭발이 일어나지 않도록 보일러 증기 빼기 작업을 하고 있었다. 펌프 가동을 위해 방수 격벽을 다시 여는 시도가 있었지만 이것은 헛된 시도였다. 배의 불빛과 전력을 유지하기 위해 발전실에서는 엔진을 계속 가동했다. 


01:20 경에 제 4 보일러 실에서 아래까지 침수가 시작됐다. 쏟아져 들어오는 물줄기가 바로 펌프를 압도하고, 기관 조수들은 피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선미 측에 있던 엔지니어드은 제 1, 제 2, 제 3 보일러 실이나 터빈, 엔진실에 남아 있었다. 


배의 불빛과 펌프를 작동시켜 구난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보일러와 발전기를 계속 가동했다 .이들 때문에 타이타닉은 침몰 전까지도 계속 불을 밝혔다. 그러나 배에 있던 35 명의 엔지니어와 전기 공학관련 선원은 살아 남지 못했다. 


구명 보트는 몇 분 간격으로 계속해서 내려가고 있었지만, 대부분 구명정은 심하게 정원 미달 상태였다. 


5 번 보트는 41 명 밖에 타고 있지 않았으며, 3 번 보트는 32 명, 8 번 보트는 39 명 밖에 타지 않고 배를 빠져나왔다 . 1 번 보트는 정원 40 명인데 12 명 밖에 타고 있지 않았다 .


일등 선실의 승객은 구명정 강하 도중 갈비뼈가 골절되는 등 구명정을 내리는 과정도 위험의 연속이었다. 6 번 배는 배의 측면에서 들어온 물 때문에 침몰할 뻔 했으나 가까스로 물을 퍼내 최악을 면했다. 


조난 신호



01:20 갑판에 승객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느끼고, 남자들과 여성들은  구명 보트 앞에서 작별 인사를 시작했다. 


조타실에선 근처를 지나는 배의 관심을 끌기 위해 몇 분마다 반복 조난 신호 CQD 을 보냈다. 


무선 통신실에서 2명은 다른 선박들에게 도움 요청 통신을 재차 보냈다. 이에 몇 척이 응답했는데 그 중 카르파티아호가 가장 가까운 58 마일 (93 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러나 이 배는 상당히 느린 배여서 최고 속도가 17노트 (31 km / h) 밖에 나오지 않았고 가라 앉아가는 배에 도착할 때까지 4 시간이나 걸렸다 . 다른 응답을 한 선박으로는 마운트템플호가 있었지만 타이타닉호 방향으로 진로 바꿔 오다가 커다란 빙산에 막혀 버렸다.


캘리포니아 바겐호는 몇 시간 전부터 타이타닉호에 빙산 경고를 하고 있었다. 바겐호 역시 유빙에 길이 막히자 잠시 정박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타이타닉 호가 빙산에 충돌하기 10 분 전인 23:30 캘리포니아 바겐 호는 무선 통신을 끄는 바람에 타이타닉호의 구조신호를 듣지 못했다.


만약 캘리포니아 바겐호와 타이타닉이 교신이 됐다면 수백 명의 소중한 생명을 구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제 타이타닉 호에 타고있는 사람들은 모두 배가 침몰되고 있으며, 모두가 탈만큼 구명 보트가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그런 와중에도 최악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에 아직도 매달려있는 사람도 있었다. 나중에 이동한다고 해서 아내를 먼저 구명 보트에 태워 보낸 남편도 있었고 헤어지기를 거절한 부부도 있었다. 


한 부부는 갑판 의자에 앉아 끝을 기다리기도 했다. 한 손님은 구명 조끼 대신 정장으로 갈아 입고 신사 답게 배와 운명을 같이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구명 보트에 탄 승객의 대부분은 일등 선실 및 2 등 선실의 승객이었다. 


3등 선실에 있던 승객들은 방수 격벽으로 통로가 여기저기 막혀 대부분 갑판에 도착할 수 없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리는 단순한 사회적 이유뿐만 아니라 미국 이민법의 조건에 의한 것이었다. 미국법에는 삼등 승객을 격리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적어도 일부 타이타닉 호의 승무원은 삼등 선객의 피난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기도 했다. 일부러 문을 잠궈놓기도 했는데, 이것은 분명히 삼등 선객이 구명정에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반대로 일등 선실은 갑판에 도달하는데 가장 조금만 움직이면 됐다. 따라서 구명정까지의 근접한 대부분은 1등 혹은 2등 선실 승객일수밖에 없었다.


삼등 선객 속에서 사망자가 많이 발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상황을 직감한 일부 승객은 도망 시도를 전혀 하지 않고 삼등 선실 식당에 모여 기도하기도 했다. 실제 기관 조수는 갑판 아래 삼등 선객들이 모여있는 것을 목격했다. 


마지막 구명정





01:30까지 타이타닉은 5도 정도만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후 상황은 빠르게 악화됐다.


01:25에는 "여성을 배에 싣고 내리고있다", 

01 : 35에는 "엔진 룸 침수」, 

01 : 45에는"엔진 룸은 보일러까지 만수 '. 


여기까지가 타이타닉에서 나온 마지막 해독 할 수있는 신호였다. 이후 메시지는 뒤죽박죽으로 불완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 명의 무선 통신병은 조난 신호를 거의 끝까지 계속 보냈다.


이제부턴 남아있는 구명정에는 사람들이 탑승인원 제한인원까지 탔고, 타고자하는 사람이 점차 쇄도하게되었다. 


11번 보트는 적재 인원보다 5 명 더 많이 태웠다. 그래서 배를 떨어 뜨릴 때 잠수하듯 물에 대부분  잠겼다 올라왔다. 


15 번 구명 보트는 하마터면 13 번 구명 보트 위에 떨어질 뻔하기도 했다. 



구명정 14 번에는 자기만 살겠다고 우격다짐을 해가며 타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에 해당 보트담당 승무원은 공중에 3발의 경고사격을 하기도 했다.


또 앞서 선장의 명령을 잘못 해석한 승무원은 더 태울 여자나 아이가 없었고, 구명정에 자리가 남았음에도 남자들을 더 태우지 않고 배를 내리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발사 한 보트는 접이식 D이다. 이 배는 25 명을 태우고 02:05에 배에서 떨어져 나갔다.


일등 선객의 한 여성은 보트 타는 것을 포기하고 결국 죽었지만, 일등 선실의 여성이 사망 한 것은 그녀를 포함한 단 4명 뿐이었다. 


마지막 보트가 떠나가자 선장은 남은 사람들에게 "이젠 자기 몸은 자기가 지킬 때"라고 말했다.


선미에선 한 신부가 사람들의 참회를 듣고 죄 사함을 주고 있었다. 타이타닉의 악단은 체육실 밖에서 계속 연주했다. 빙산과 충돌 후 30 분 정도 후 스미스 선장이 라운지에서 연주를 시켰다. 


거기 있던 승객의 기억에 따르면, 악단은 " 알렉산더 스 래그 타임 밴드 '같은 밝은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수백명의 삼등 선객은 마지막 구명 보트가 출발하는 순간에야 갑판에 도착했다. 


배에 남은 스미스 선장은 결국 죽은 채 발견됐지만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선 확실히 알려진 게 없다.


침몰의 마지막 순간 (02 : 15-02 : 20)


02:15 무렵, 타이타닉 내부에 물이 가득해지면서 기울기는 급속히 증가됐다.


기울기가 갑자기 커지면서 보트 A와 B를 내리던 승무원들은 바다에 빠지기도 했고, 배에 탔던 사람들이 다치기도 했다.



목격자에 따르면, 시간이 갈수록 타이타닉 선미는 공중으로 높이 올랐다. 각도는 30-45도 정도에 도달했다고 한다. 당시 많은 생존자가 큰 소리를 들었는데, 이는 보일러가 폭발한 게 아닌지 의심됐다. 잠시 후 배의 불빛이 한번 깜박인 것을 마지막으로 타이타닉은 완전히 캄캄해졌다.



이미 침수한 선수는 배를 바다 속 아래로 당기었고 그럴수록 선미는 공중으로 올랐다. 양쪽에서 큰 힘이 발생하자, 결국 배가 두동강이 나려했다. 불빛이 사라진 직후 배에선 찢어지는 듯 큰 소리가 났다. 


02:20. 빙산과 충돌한지 2 시간40 분 후, 타이타닉은 이제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물에 빠진 후 타이타닉의 뱃머리와 선미는 단 몇 분만에 3795 미터 아래까지 내려갔다. 배의 두 부분이 떨어져 있는 거리는 600미터 정도였다. 



수중 승객과 승무원 (02 : 20-04 : 10)



침몰의 결과로 수백 명의 승객과 승무원은 곧바로 차가운 바다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상태에 놓였다. 


구명정에 타지 못하고, 바다로 뛰어든 일부 사람들은 타이타닉호에서 떠오른 잔재물에 맞아 부상을 당하거나 사망하기도 했다. 또 떠오른 파편을 붙잡고 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2 ℃의 온도에서 차가운 해수은 생명을 위협할만큼의 차가움이었다. 


당시 바닷물에 빠졌다 구조된 사람은 '천개의 칼'에 찔리는 느낌이라고 회상했다.


물에 빠진 즉시 심장마비를 일으켜 즉사한 사람도 있었다. 처음에는 심한 떨림이 와서 체온이 저하하는 동시에 맥박을 느리지면서 의식을 잃고 사망했다. 전형적인 저체온증이다. 


구명정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바다에 빠진 사람들이 지르는 고통의 소리에 몹시 겁을 먹거나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물에 빠졌지만 살아난 사람도 있다. 접는 보트 B에 타 있던 12여명의 승무원은 빠진 사람을 구조하고 몸을 녹일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다했다. 


그러나 많은 구명정은 빠진 사람을 태웠다간 보트 전체가 침수될 위험이 있다며 구해달라는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노를 저어 그 자리를 떠났다.


구조되지 못한 사람은 대부분이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 


공석이 많았던 18 척의 구명 보트 승선자들은 무엇을 해야하는지 논의하면서 주위만 돌았다. 4 번 배는 침몰 한 타이타닉 가장 근처에 머무르고 있던 배였다. 이 때문에 배가 침몰하기 전에 두 사람이 4번 보트 쪽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4번 보트는 침몰 후 7 명을 물에서 구조했지만 이중 2 명은  사망했다. 


그러나 대다수 보트는 두렵다는 이유로 빠진 사람들을 구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20 분 정도 경과하여 헤엄 치고있는 사람들은 의식을 잃고 죽어가면서 살려달라는 외침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배에 탔다고 해서 모두 다 산 것도 아니었다. 생존용품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배들의 상황이 특히 나빴다. 재난에 지쳐 스스로 바다에 빠져 익사한 사람도 있었다. 밤 사이에 보트에서 얼어죽은 사람들의 시체 대부분은 남은 생존자를 위해 바다에 내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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